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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관련글

응답하라 2002 -1화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97응답하라 1994를 재미있게 봤던 애청자였습니다. 얼마전 부터 응답하라 시리즈 외에도 "건축학개론""써니" 등 80~90년대 복고풍 콘텐츠가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올해는 4년마다 개최되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입니다. 복고열풍이 불고 있는 이때, 저 역시 예전 추억시리즈를 블로그에 연재할까 합니다.

 

이름 하여

 

 

응답하라 2002

 

 

대한민국 20대 중반 이후의 대부분 국민이라면 2002년은 누구나 한 번쯤 다시 되돌리고 싶은 기간일 것입니다. 저 역시도 2002년은 무척 특별했고, 이때의 추억으로 제 인생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저를 아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다시 한 번 소개하자면 저는 정말 평범한 축구팬이었습니다. 뛰어난 학벌이나 특별한 스킬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축구팬이었지만, 많은 축구팬들이 부러워하는 프로축구 구단에 취직하여 수많은 축구선수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 일종의 행운아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성장해왔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저의 축구 이야기를 응답하라 시리즈로 꾸며보겠습니다.

 

응답하라 2002의 첫 번째 이야기는 응답하라 1994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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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가 나온 초등학교 전경-

 

1994년 6월 17일, OO국민학교 6학년 1반......

 

 

"일단 우리가 이런 세트플레이를 많이 연습했는데요.. "

 

"홍명보 선수에게 내 주겠죠?"

 

"네 홍명보 그대로 슛~!!!!"

 

"골이에요~~ 골인.!!!:

 

 

당시 축구에 축자도 모르던 저는 학교에서 틀어줬던 미국 월드컵 한국vs스페인전에서 홍명보 선수가 프리킥 골을 넣자 학교 전체가 환호했던 것이 축구의 첫 기억입니다.

 

이때 어린 마음에 주변 사람들이 열광하는 분위기가 좋아 골을 넣었던 홍명보 선수의 팬이 되었고, 이때부터 막연히 축구를 보고 응원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2012년 1월 인터넷 신문 캡처-

 

2012년 1월...

 

1994년 월드컵 대표팀의 선수단이었던 박항서 트레이너, 구상범 선수가 각각 우리 팀의 감독과 코치로 선임되어 선수단 매니저를 하던 저는 초등학교 때 열광했던 축구영웅들과 식구가 되었습니다.

 

저의 고향 상주는 축구와 관련된 2명의 유명한 선수가 있습니다.

 

1990 이태리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했고,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대표팀에 합류했던 구상범 선수와 2002년 진공청소기로 많은 인기를 끈 김남일 선수.. 모두 아버지가 상주사람이란 이유로 상주에서 90년대 기억이 있으신 분들은 구상범 선수를.. 2002년 기억이 있는 사람은 김남일 선수를 특히 좋아합니다.

 

김남일의 인기가 얼마나 많았냐 하면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얼마 후 김남일 선수가 소속된 전남의 경기를 상주에서 유치할 정도의 인기였고 당시 프로축구가 뭔지도 모르던 상주에 2만 명의 관중이 움집 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 김남일 선수는 부상으로 당시 경기엔 출전 못 했죠.ㅋ

 

이날의 경기는 훗날 상주상무의 창단에 작은 씨앗이 되었고, 당시 이 경기를 유치했던 분은 상주상무의 초대 단장으로 취임하십니다. 그리고 이때 전남의 상대 팀이었던 포항의 모 선수는 상주의 코치로 활동하시게 되고...

 

김남일 선수는 그냥 팬으로서 알고 있다면, 구상범 선수는 제가 모시는 코치님으로 1년간 함께 동고동락했습니다. 94년 영웅을, 그리고 상주에서 전설로 불리던 그분과 함께 생활한다는 게 신기했고, 구상범 선수의 축구 스토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 왜소한 체구에 특별한 주특기도 없는 그저 그런 선수..... 항상 경기 땐 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서브명단에도 끼지 못했던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사실 구상범 선수는 다른 선수들처럼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하지 않고 중학교 이후 축구부에 입단하여 시작이 상당히 늦었습니다. 그래서 또래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기본기는 늘 아킬래스건으로 작용했고, 월드컵 대표팀의 주전으로 활약하던 당시에도 어느 정도 기본기가 갖춰진 유소년 축구부원이라도 누구나 가능한 기본적인 볼 리프팅(축구공으로 제기차기하거나 하는 기본적인 기술)이 서툴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족한 기본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남들보다 더 열심히 뛰고, 연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작의 차이가 너무 컸던 것일까? 축구에 입문하고 시간이 흘러도 실전경기에 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습니다. 경기를 뛸 수 없는 시간이 자꾸 길어지자 축구에 재능이 없다고 여긴 어린 구상범은 축구를 포기하느냐란 생각도 했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축구밖에 없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이전보다 더 많은 훈련과 노력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열심히 하던 그는 나이가 들고 고등학교 고학년이 될수록 경기에 출전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이윽고 팀에서 필요한 자원으로 성장했습니다. 중간에 크게 다쳐 축구를 그만둬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꾸준히 실력을 쌓은 그는 고등학교 졸업반이 된 그에겐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연고대와 같은 축구 명문 대학을 가는가? 아니면 인천대라고 하는 축구부 창단하는 대학을 가느냐.??

 

 

-상주지역 초등학생에게 축구 재능기부 중인 구상범 코치-

 

당시엔 뒷돈을 들여서라도 무조건 명문대를 보내던 철저하게 학교 간판을 보던 시기에 구상범 선수는 큰 결심을 합니다. 학창시절 누구보다도 후보선수에 대한 설움과 경기에 뛰고 싶은 열정이 있던 그는 명문대에 가서 벤치를 지키느니 차라리 신생팀에 가서 그 신생팀을 이끌고 성공해보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적중하여 인천대에 입학한 이후 줄 곳 많은 경기에 출전하며 두각을 보여 결국은 올림픽 대표와 럭키금성을 거쳐 월드컵 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하는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후 인천대학교의 감독과 강원FC의 코치 및 2군 감독을 거쳐 상주상무의 코치로 저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구상범 코치님은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무척 착한 분입니다. 선수를 은퇴하고 잠시 영국에서 생활하셨습니다. 당시엔 지금처럼 학생들이 유학을 쉽게 가던 시기가 아니고 워킹홀리데이와 같은 시스템도 없는 상황에서 영국에 유학 온 한국 유학생들이 라면이나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는 등의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자신의 집으로 힘들게 생활하는 유학생들을 불러 주기적으로 고기파티를 여는 등 식사 대접을 해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당시에 구상범 선수의 고기파티는 입소문을 타고 여러 지역에서 유학생들이 찾는 알만한 사람은 안다는 장소가 되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던 구상범 코치님께서 어떨 땐 너무 많은 학생이 찾아와서 금전적인 부담이 심했다고 고백을.ㅋㅋ)

 

1994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어린 저는 축구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남들이 환호할 때 그 분위기가 좋아서 이때부터 축구팬이 되었는데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11년, 어린 시절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으로 여겼던, 약간 우상적인 존재로 여겼던 월드컵 대표 선수단의 일원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응답하라 2002 시리즈는 어떻게 쓸지, 분량이 얼마나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반응이 좋으면 즉흥적으로 쓸 것이며, 반응이 썰렁하면 중도에 포기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쓰는 동안은 최대한 정성을 들일 생각입니다.

 

당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제가 기억하는 것을 토대로 쓰기 때문에 약간의 과거 미화나 왜곡이 있을지 모르며, 또한 구단 내부적인 상황엔 말 못할 부분이 많아 이야기가 매끄럽지 못할 부분도 상당히 많을 것이라 생각되네요.

 

2화는 98월드컵 이야기와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지켜보는 축구팬에 관해서 쓸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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